두 사람이 트럭을 타고 떠나는 모습을 입구 옆 벤치에 앉은 노인들이 지켜보았다. 노인들은 과장보다 대여섯 살 많아 보였다. 그들은 얇은 코트 혹은 우비만 걸친 채 매일 벤치로 왔고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노인들이 무엇을 하러 오는지 노아는 잘 몰랐다. 시간을 때우러 오나 보다, 막연히 추측했을 뿐이었다. 그것은 이 소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가장 자주 하는 일이었다. 느리고 꾸준히, 표정 없는 얼굴로 시간을 흘려보내는 일. (261쪽)
현호정의 작품은 구분되는 두 세계에 관해 이야기한다. “우리”와 “그들”이 존재하는 두 세계는 일정 거리를 둔 채 동떨어져 있다. 다만 노아로 인해 잠시 겹쳐진다. 이때, 두 세계가 공유하는 공통 지점은 ‘이름’이다. 정선화. 두 세계가 섞이지 않기 위해 가짜로 댄 이름으로 인해 두 세계 사이 교집합이 발생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선화는 이를 ‘기막힌 우연’으로 치부한다. “제 이름으로 계속 남을 부르려니 기분이 이상해요.” 남을 부르는 일이 나를 부르는 일처럼 느껴지고, 이때 나와 남의 구분은 모호해진다. "갈색이라고도 베이지색이라고도 할 수 없는 모호한 빛깔의 파티션처럼."
반면, 녹원은 두 세계 간의 구분이 명확한 인물이다. 그러므로 노아에게 계속 지시한다. 그들과 너무 오래 이야기하진 말라고. 너무 오래 눈 마주치지 말라고. 녹원뿐만 아니라 선화 또한 각각의 세계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표현을 사용한다. 자신의 세계 바깥에 존재하는 인물들을 “그들”로, 그리고 그들을 ‘적’이라고 표현한다. “우리의 적들이 산을 오를 때.” 적이라고 여기는 이유는 두 세계 간에는 영영 겹칠 수 없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지점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다는 건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기반으로 한다. 노력한다고 해서 이해하게 되는 건 아니므로 남욱은 그저 받아들인다.
“저는 이제 그런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아요.
(...) 그냥 받아들이는 거죠. 세상에 이런 사람들이 있다고요.”
자신이 존재하는 세계 속에서 해야 하는 각자의 일을 수행하는 것. 그것이 “우리”와 “그들”이 공존하는 세계 속에서 인물이 살아가는 태도가 된다. 그러므로 노아가 선화에게 자신의 본래 이름을 밝히는 장면은 작품 속에서 얼마간 필연성을 가진다. 그들 사이 유일한 교집합을 완전히 제거함으로써, 두 세계는 다시 일정 거리를 두며 분리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