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 자연이랄 게 남아 있질 않은데 어떻게 자연재해가 일어나냐고 아이들은 물었고, 어른들은 모른단 말 할 줄 몰라 울었고, 다 막 죽기 시작하는데 아이들은 원래 잘 안 죽잖아요. 어른들이 죽이지 않는 한은요. 무릎 털고 살아남아 자기 문제 정답을 스스로 지었답니다. 풀이 과정을 서로 서로 바꿔보고 베껴가며 다음 세대로 자라났고요. 이런 일이 몇 차례 더 이어졌답니다. 아무도 기록하지 않아 역사는 될 수 없었지만, 기억하는 사람들은 말을 했으니.
(...) 무엇보다도 여기까지 이어진 질긴 목숨이 영 낯설어서. 이상해서. 징그러워서. 이게 내 것 같지 않아서. 그걸 가졌단 수치심도 내 것 같지 않아서. 도무지 내가 내 몸이 내 마음이 어느 것 하나 내 것 같지 않아서 믿어지지 않아서. 그 모든 일을 겪은 뒤 여전히 여기 있다는 게 내가 여전히 여기 있다는 게 내가 이렇게 외롭게 이렇게 아프게 슬프게 배고프게 내가 계속 여기 있다는 게 그러니까 여기 이렇게 있는 게 다름 아닌 나라는 게.
"아름다운 것과 살아 있는 것을 어떻게 구분하지?"
누군가 자기 골반에 돋아난 자그만 정강이를 쓰다듬으며 물었습니다.
"난 구분 못해."
손가락 끝에서 자라난 동그란 가슴과 배에 입을 맞추며 다른 누군가 답했습니다.
"난 안해."
"그 모든 일을 겪고도 아직도 몰라? 너는 내 안의 쌍둥이야. 내가 기른 나의 분신이야. 아름다운 기생체야. 심장을 가진 조그만 머리통이야."
"여기 있는 것과 아름다운 것을 어떻게 구분하지?"
어깨 위에 있는 동생에게 묻자 동생은 귀찮다는 듯 빵 봉지 속으로 툭 들어가더니 흰 빵들 사이에 숨어버렸다.
함윤이의 작품에서 두 세계의 분리에 관해 이야기했다면 현호정의 작품은 하나의 육체 속 분리되는 두 존재에 대해 이야기한다. 멸망과 생존. 분리와 결합. 두 개념은 언뜻 대비되어 보이지만 실상은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렵다. 기생 쌍둥이 속 자생체와 기생체에 대해 더 이야기해 보자.
자생체와 기생체는 하나의 육체라는 형태로 결합해 있다. 동일하지는 않은 둘 또한 완전히 다른 것으로 구분되기는 어렵다. 구분할 수 없음은 곧 구분하지 못함으로 이어진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생체와 기생체 간의 경계가 모호해지기 때문이다. 둘 사이 힘의 크기가 역전될 때, 내가 있어야 너도 존재할 수 있다는 종속 관계의 명백함은 서서히 흐려지기 시작한다. 기생체의 힘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때, 자생체는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다.
이러한 두 관계를 우리의 삶으로도 치환하여 읽어볼 수 있다. 희망과 절망. 둘 또한 자생체와 기생체처럼 얼기설기 얽혀 있는 모양새이다. 각각의 요소로 떼어내기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둘이 결합한 상태를 그저 살아갈 뿐이다. 그 방식은 “부랑”이다. 흘러가며 자라고 떠다니며 지내기. 그러므로 K의 카페에 “부랑자”가 매일 방문하는 일은 이 작품 속에서 필연성을 띤다. 부랑하고 있다는 말은 곧 살아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절망 속에서도 배가 고파 밥을 먹고, 고통 속에서도 누군가와 함께 웃고 떠들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는 다음의 세대로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